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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하 (4월 22일~ 5월 16일)

사무엘상하 그리스도 중심 읽기 강의 영상 필수 시청. 매 영상이 그렇지만, 영상이 참 좋습니다.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르게 읽는 시각을 줍니다.

사무엘상

사무엘상의 핵심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왕정을 세운다는 것과 사울이 아닌 다윗을 통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은 사무엘에 대한 이야기 (삼상 1:1-7:17), 왕의 권리들 (8장)과 사울 이야기 (삼상 9-15장), 사울과 다윗 이야기 (16-31장)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삼상 1-2

불임 여인 한나를 통한 사무엘의 출생 이야기가 불임의 사라를 통해 이삭이 출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를 조롱하듯,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게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왕정을 가져오게 할 구원자 사무엘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는 1-2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경륜을 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구약에서 최초로 한 사람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세 가지 직분이 선명하게 나타난 첫번째 사람입니다.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 (왕)였고, 제사장이었고,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경건함과 제사장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대조함으로서 영적으로 타락해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의 단초를 엿보게 하는 발단의 이야기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의 규정을 어기며 자기들의 배를 채웠고 심지어는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성관계를 할 정도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간이 배밖에 나온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그들의 악행을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것” 이라고 했습니다 (2:17).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멸시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30).
지금 우리 시대에 있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 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는 것” 이겠죠?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든 주일에 드리는 예배든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마음 없이 그저 형식적이고 내 마음에 내키는 대로, 나 중심적으로 행하는 예배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멸시함으로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3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삶 전체를 “거룩한 산 제물” 로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무도 홀로 없을 때, 가정과 일터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며 예배하고 살아가는지 돌아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삼상 3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전체의 선지자로 세우신 내용입니다.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 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도 같습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께 날 때부터 구별된 (나실인)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분이 앞으로 사무엘을 통해 하실 큰 일을 소망하고 기대하게 합니다.

삼상 4

비극의 장입니다. 이스라엘에 블레셋과의 싸움에 져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았기고, 하나님의 예고대로 엘리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고, 엘리 제사장은 목이 부러져 죽었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며느리가 아이 이름을 ‘이가봇’, 즉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나라고 지은 것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빼았긴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나신 것임을 알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심판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하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사무엘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해야 함에도 그것을 마치 전쟁의 수호신같은 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4:3). 이는 지금도 우리들의 신앙에 은밀하고도 깊숙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배든 기도를 내 단지 삶의 필요나 어려움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열심을 내는 것이 그렇습니다. 삶의 문제와 어려움의 해결보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먼저이며 전제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문제와 어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게 하고 그분과 더 깊은 만남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3절에 엘리 가문이 하루만에 몰락한 이유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4:13)
엘리가 자기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 아들들의 죄악을 알면서도 방관하고 방치한 것이 심판의 근본 이유였습니다. 이는 부모들에게 아주 중요한 자녀 양육의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자녀들이 잘못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훈육하고 죄악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삼상 5-6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가 다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를 거쳐 기럇여아림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임재(언약궤)가 그들에겐 심판이 되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교제하게 하는 구원입니다.
블레셋의 신 다곤의 얼굴을 땅에 처박으시고, 머리와 두 손목이 절단되어 엎어져 있는 모습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며 전능하신 참된 신임을 선언하는 통쾌한 장면입니다. 하나님 홀로 싸우시고 승리하신 용사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언약궤가 돌아왔다는 건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자기 백성에게로 오신 것입니다.

삼상 7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개혁하고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삼상 8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과 사무엘이 왕의 제도를 가르칩니다. 왕의 제도가 가져올 고통을 말해 주어도 이스라엘은 그대로 이방나라들처럼 왕을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이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 (8:7) 이었습니다.
세상을 부러워했고, 세상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의 제도, 문화, 성공을 욕망했습니다. 이미 그들의 왕은 세상의 신이었고, 세상의 가치관이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복과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우리가 왕되신 주님을 버리고 세상을 동경하고, 부러워하며 세상의 물질, 안전과 안락함, 부와 성공과 건강 장수를 나의 왕으로 삼으며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자의 안녕과 행복은 언제나 선하시며 완전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 아래에서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림받으며 살아갈 때입니다.

삼상 9-10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 사울이 등장합니다. 9장과 10장은 이스라엘 왕국의 건국 스토리입니다.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으주시며 왕을 세우는 과정 역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가 작동합니다. 인간편에선 그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아들을 보내고, 그 나귀를 찾는 과정에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가지만 이 모든 것이 이미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알리신 바였고, 하나님의 택함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의 직분을 부여하면서 기름을 붓습니다 (9:28-10:16). 그리고 여호와의 영 (성령) 이 그에게 임하여 그가 왕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변하게 하셔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기름부음은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부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구약의 기름부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름붓듯 성령의 부음을 받고 (성령 세례) 하나님의 종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 것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기름부음받은 자 = 메시아 (히브리어) = 그리스도 (헬라어) 입니다. 그리스도인 모두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단회적)이기에,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요구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출중한 외모와 키와 효심과 유력한 가문출신 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그들의 요구로 인해 왕을 세운 것에 대해 평가를 합니다.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 도다
이렇게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선지자 (모세) →사사→ 왕에 의해 통치되는 왕국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원형이었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왕으로 두기 거부하고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반역을 했던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인간은 모든 역사는 결국 누가 왕이냐의 싸움이었습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속에 인간이 세운 왕이 교만과 자신의 악으로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 그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의 부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내가 왕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루를 돌아보며, 왕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하루를 살기를 소원합니다.

삼상 11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협박해서 자기들을 섬기라고 하자 사울이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대패시켰습니다 (1-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에게 열광하고 사무엘은 길갈에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확인시킵니다 (12-15).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울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이 사울을 세워서 그에게 승리를 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에게 열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열광했어야 합니다.

삼상 12

사무엘의 고별사입니다. 선지자이면서, 사사(왕) 였던 사무엘이 선지자의 직분은 계속하지만 사사로서 다스리는 것을 사울에게 이양합니다. 13절에서 분명히 사울은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 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 말 속에 사울이 앞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왕이 될지 불길한 징조를 느끼게 합니다.
1-6절엔 사무엘이 선지자와 사사로서의 자신의 사역의 신실함을 입증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사도직 수행의 성실. 정직함을 피력한 것과 너무 닮아 있습니다 (행 20, 20:31-35). 이를 통해 목회자로서의 저의 사역과 삶을 깊이 돌아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반역과 불순종에도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고, 하나님 자신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2).
여기에 교회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어두운 시대,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보이지 않는 듯 할때 조차도 하나님은 자기 이름과 영강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역사의 마지막까지 보존하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이렇게해서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왕정 시대로 넘어갑니다. 초대 왕으로서의 사울은 과연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의와 정직과 사랑으로 다스리며, 이방 민족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잘 드러낼 것인지 기대해 봅시다.

삼상 13

사울이 왕이 된지 이년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밀리자 사물엘을 기다리지 않고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여호와께 드리는 죄를 범합니다. 이로 인해 사무엘은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어겼기에 왕위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로 넘어갈 것임을 예고하였습니다 (13-14).
왕이 되어 다스린지 불과 이 년에 사울은 이렇게 추락해 버립니다. 그 역시 여호와의 명령을 가볍게 여겼고 제사를 멸시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앙위를 다윗에게 넘겨주신 것이 아니라, 사울 스스로 하나님이 세우신 왕위를 걷어찬 것입니다.
사울이 조금만 더 인내하고 사무엘을 기다렸다면…. 10절에 “사울이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그때서야 사무엘이 옵니다.” 블레셋 군대는 압박해 들어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숨어버리고 겁에 질려 패색이 짙은 위기 앞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서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조급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결정과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지 알면서도 눈 질끈 감고 인간적인, 세상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해 버립니다. 그런 행동들에 대해 구약시대처럼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징계하시진 않으시더라도, 분명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임을 알게 해 주는 본문입니다.

삼상 14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해 있을 그때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무기든자 하나랑 블레셋을 쳐서 이십명 가량을 죽입니다 (14). 거기에 사기가 진작된 이스라엘은 용기를 내어 블레셋과 다시 싸우러 나와 큰 승리를 거둡니다. 전쟁은 ‘사기’의 싸움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 줍니다. 물론 당연히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동역하였고 (45)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택한 왕은 계속해서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사울의 계속되는 경솔함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하시고 왕정을 안정시키십니다. 이것이 사울 왕의 의의(sinificance) 입니다 (47).
사울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길때와 똑같이 언약궤를 자신의 전쟁의 승리를 위한 부적으로 사용하는 죄를 반복합니다 (18).
14:24-30절엔 사울의 여러가지 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정리해 보면
백성을 사랑함이 없는 자기 중심적 왕이었음, 이미 왕의 자질을 상실했습니다.
맹세를 경솔히 남발했습니다 (사사 중 입다처럼)
미련하고 우두했고
자신의 전가를 오리려는 것에 집착하여 분별력과 판단하는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38- 4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의로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왜 요나단이 뽑히게 하셔서 위기로 몰아가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요나단의 의로움을 드러내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죽지 않고 도리어 사울의 맹세가 지켜지지 않게했으며 백성들은 이를 위해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는 이것을 사울과 백성들 간의 “맹세 공방” 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삼상 15

15장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와 불순종에 대해 많은 것들을 투영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사울에게 하자, 사울이 아멜렉을 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좋은 것은 남기고 무가치한 것들은 남깁니다 (1-9).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위를 폐하는 결정적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고, 사무엘은 근심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11). 하나님은 후회함이 없으신 분인데 이런 표현을 성경이 쓰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에 대비시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35절에도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을 “동성동형론적 표현(anthropomorphism-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을 하나님께 비유하는 것)” 이라고 조금 어려운 용어를 씁니다.
사울의 순종은 껍데기 순종이었습니다. 형식은 갖추었지만 본질은 부분적 순종, 선별적 순종(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게 하셨고 자격없는 자를 왕으로 세운 것을 망각하고 자기가 잘나서 이룬 업적으로 여기고 자기를 위한 기념비까지 세우는 교만함을 드러냈습니다 (12).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사람을 두려워해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습니다 (24).
사울의 죄는 결국 아담의 죄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제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라는 그 유명한 구절이 여기서 나옵니다.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우리로 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주일 예배보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보다 낫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 예배가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순종이 곧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23절에서 우리가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을 사무엘이 합니다.
사무엘상 15:23a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점치고 우상 숭배라는 것은 우리에게 불순종의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몰락을 통해 우리는 온전한 왕을 구하게 됩니다. 그 왕의 등장이 16장부터이지만, 완전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인간 왕의 몰락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삼상 16

슬퍼하고 있는 사무엘을 일으켜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것이 (7)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외모를 보신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안에 주신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성령이 떠나시자 사울은 여호와가 부리시는 영에 사로잡히고 다윗은 기름부음받고 여호와의 영에 사로잡혀 왕으로서의 일을 시작합니다. 여호와가 부리시는 영이란 사탄이 하나님의 통제하에서만 활동한다는 것을 말하지, 하나님께서 사울이 귀신들리도록 악한 영을 그에게 불어넣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것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떠나자 악령에게 자신을 내어준 것이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 (예표, typo)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받고 여호와의 영을 부음받은 후 왕으로서 사역하는 것은 메시아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고 공생애를 시작한 것이 최종 그림입니다. 이사야 61장에 기름부음 받은 종이 메시아 사역을 하는 것의 성취입니다.